[한국 2-0 그리스] 허정무의 맞춤전술, 레하겔을 격파하다
[피치액션 l 안경남] 조금의 기대는 했지만 이정도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한국은 경기를 지배했고 수차례 찬스를 만들어내며 한수 위의 실력을 선보였다. 반면 그리스는 그동안에 지적됐던 약점을 모두 드러내며 무너지고 말았다. 이날 경기는 마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폴란드전을 연상케 했다. 한국 선수들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그리스 선수들은 오랜만에 출전한 월드컵 무대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술, 개인능력 그리고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한국의 승리였다.
선발 라인업
한국은 4-4-2 시스템을 사용했다. 박주영과 염기훈이 투톱 파트너로 낙점됐고 좌우 측면에 박지성과 이청용이 자리했다. 그러나 염기훈이 좌측으로 빠지고 박지성이 중앙으로 이동하며 4-2-3-1/4-5-1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기성용과 김정우는 더블 볼란치를 구축했는데 기성용의 경우 공격 보다는 수비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포백은 큰 변화가 없었다. 스피드와 힘이 좋은 차두리가 오른쪽 풀백으로 나섰고 정성룡이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다.
스리백과 포백을 두고 갈팡질팡하던 그리스는 공격적인 4-3-3 시스템으로 경기에 나섰다. 세오파니스 게카스가 최전방을 지켰고 디미트리오스 살핀기디스 대신 안젤로스 차리스테아스가 선발 출전했다. 부상으로 공백이 예상됐던 센터백에는 측면 풀백인 루카스 빈트라가 아브람 파파도풀로스와 호흡을 맞췄고 좌우 측면에는 기오르카스 세이타리디스와 바실리오스 토로시디스가 배치됐다.
전술 포인트
논란이 됐던 그리스의 수비는 스리백이 아닌 포백이었다. 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했던 소티리오스 키르기아코스와 반겔리스 모라스는 선발 명단에서 제외됐고 대신 빈트라가 중앙 수비로 나섰다. 문제는 이것이 그리스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점이다. 이날 그리스의 포백은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빈트라의 경우 중앙 보단 측면에 더 익숙한 선수며 파파도풀로스 역시 키르기아코스와 모라스가 빠지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수비 뿐 아니라 공격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는 공격의 시발점이자 팀의 에이스인 게오르기오스 카라구니스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레하겔 감독은 후반 시작과 함께 카라구니스를 빼고 크리스토스 파차초글루를 투입하며 긴급 처방전을 내렸지만 내용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측면의 게오르기오스 사마라스와 차리스테아스가 한국 풀백과의 대결에서 좀처럼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좌우 풀백인 세이타리디스와 토로시디스도 박지성, 이청용, 염기훈 등 한국 측면 미드필더들의 강한 압박과 스위칭 플레이에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세트피스, 승자는 한국!
한국의 선제골은 전반 7분 만에 터졌다. 이영표가 코너킥 근처에서 파울을 얻었고, 이를 기성용이 날카로운 프리킥을 통해 수비수 이정수의 골을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 매번 그리스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언급했던 경계대상 1호! 세트피스가 독이 아닌 득이 됐다는 점이다. 이정수의 문전쇄도도 좋았지만 그전에 그리스 수비수들을 유인한 박주영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장신의 그리스 수비수들이 비교적 신장이 작은 박주영에게 몰린 것은 다소 의아한 장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박주영은 프랑스 리그에서 가장 점프력이 뛰어난 선수 중 한명이다. 레하겔 감독과 그리스 선수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세트피스 상황에서 이정수 보다는 박주영을 막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세트피스는 그리스 보다 한국이 더 강했다. (한국은 이날 무려 11개의 코너킥을 허용했지만, 확실한 전담마크를 통해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 데이라이프 / 박지성, 그리스 수비를 초토화시키다!
무한 스위칭과 박지성 시프트
이정수의 선제골이 경기의 분위기를 바꿨다면 공격진의 무한 스위칭은 그리스의 포백을 흔들었다. 이날 박지성, 염기훈, 이청용은 경기 내내 끊임없이 위치를 바꿨다. 박지성이 왼쪽, 염기훈이 중앙, 이청용이 오른쪽에서 경기를 시작했지만 세 선수의 위치는 한 곳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표팀의 무한 스위칭은 허정무 감독이 염기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왼발잡이인 염기훈은 최전방과 왼쪽 측면이 모두 가능한 멀티플레이어다. 때문에 측면의 박지성이 중앙으로 이동할 때 염기훈의 경우 왼쪽으로 빠지며 공격을 펼쳤다.
이처럼 계속된 포지션 변화에 그리스 수비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측면에 있던 박지성이 어느새 중앙으로 이동해 역습을 시도하는가 하면, 오른쪽에 있던 이청용 역시 어느새 왼쪽으로 이동해 상대 풀백을 혼란에 빠트렸다. 대표팀의 무한 스위칭 또한 박지성 시프트를 매우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이날 박지성은 측면 보다는 중앙에 있을 때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했고 역습시 폭발적인 스피드를 선보였다. 박지성의 쐐기골이 대표적이다. 중앙에 있던 박지성은 빈트라가 볼을 놓치자 재빨리 낚아챈 뒤 드리블을 통해 그리스의 골망을 흔들었다. 지난 시즌 맨유 전술의 핵심이었던 ‘센트럴 팍’을 월드컵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한 셈이다.
* (上) 차두리는 중원까지 전진하며 상대에게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下) 그리고 공격시 매우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시도했다. 사라마스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다.
측면을 지배한 차두리
오른쪽 풀백으로 나선 차두리는 중앙의 김정우와 함께 그리스전 ‘숨은MVP’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리스전을 앞두고 한국 언론들은 이영표의 우측 이동을 예상했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은 사마라스를 막기 위해 차두리를 선발 출전시켰고, 기회를 잡은 차두리는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냈다. 차두리의 장점은 스피드와 파워다. 세밀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수비수로서 그의 능력은 상대 공격수를 봉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오랜 기간 독일에서 생활한 탓에 유럽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것 또한 장점 중 하나였다. 이날 차두리는 왼쪽의 이영표에 비해 상당히 전진하며 플레이를 펼쳤다. 뒤로 물러서기 보다는 사마라스와 직접 부딪히며 상대를 제압했다. 또한 공격시 상당히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시도했는데, 후반 박주영에게 올린 크로스는 매우 날카롭고 정확했다. (다만 수비시 상대에게 크로스를 너무 쉽게 허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는 풀백의 잘못 보다는 전방의 미드필더들의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완벽한 맞춤전술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한국은 그리스의 약점은 잘 알고 있었고 그 점을 매우 잘 파고들었다. 문제의 세트피스는 오히려 한국에게 선제골을 안겨줬고 좌우 풀백의 적극적인 압박은 그리스의 측면을 원천 봉쇄했다. 반면 그리스는 한국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스위칭 플레이에 원활히 대처하지 못했고 포백 라인의 약점 역시 그대로 드러냈다. 상대에 따른 완벽한 준비와 맞춤전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허정무 감독은 행동과 결과로 증명해냈다.
